0 < 1/2
이 글이 올라온지도 꽤 되었고, 여기에 대해 생각한 것도 꽤 오래 되었지만, 더 질질 끌면 머리속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아 늦기 전에 포스팅한다.
"10개 사시면 10%할인해드립니다"는 마케팅이 있고 "10개 사시면 1개 더 드립니다"는 마케팅이 있다.
무엇이 이득일까? --- via @melotopia
원본 글에서는 99 < 100이라는 정말 당연한 부등식을 이용해 문제를 풀었지만, 여기서 한발짝 돌아가보자.
이 문제를 살짝 일반화시키면,
"n개 사면 가격의 1/n을 깎아드립니다"와 "n개 사면 1개 더 드립니다." 중 어떤 게 소비자에게 이익인가?
라는 문제로 바꿀 수 있다.
여기서 n이 상식적(n > 0)인 범위 안에 있다면, 이 범위 안에서 에서 답은 변할 것 같지 않다. ………①
n에 1을 대입하면, 1개를 0개 가격에 주는 것과, 2개를 1개 가격에 주는 결과가 나오고,
0/1 = 0 < 1/2이므로, n개 사면 가격의 1/n을 깎아주는 편이 더 싸다고 할 수 있다. 같은 결론을 얻는다.
문제는, 생각할 때는 자연스러웠지만, ①이 그렇게까지 자명한 것 같지는 않다는 거다.
그걸 보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개가 필요하다. 을 구입 갯수라 하면
개를 구입했을때 양 기준에 따른 개당 구입가는 각각
이 된다.
판단 함수 이라고 하자. f(n) > 0이면 후자가 더 이득이고, f(n) < 0이면 전자가 이득이다. f(n) = 0이면 뭘 사든 상관없다.
이제 임의의 양수 n, m에 대하여
이므로 임의의 양수 n, m에 대해 의 부호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증명을 마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임의의 양수 n에 대해 이므로 위 증명은 정말 빙빙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학부에서 수학을 공부할 때 힘든 점
내가 대학생이 된 것은 2007년이다. KAIST는 무학과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1학년에는 기초과목을 들었고, 내가 본격적으로 수학 과목들을 듣기 시작한 건 2008년부터였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수학과 전공 72학점, 대충 말해서 약 스무 과목 정도를 들어왔고 이번 학기에 졸업하게 되었다. 내년부터는 별 일 없는 한 석사과정을 밟고 있으리라.
어쨌든 이 긴지 짧은지 영 종잡을 수 없는 기간 동안 나는 수학을 공부했다. 지금 돌아와서 보니, 참 힘든 기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힘들었던 이유 중 몇 가지는 아마도 내가 공부할 방법을 잡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1 그래서 여기에 새로 대학에서 수학 공부를 시작할 사람들을 위해 내가 고생했던 점들을 적어두려 한다.
이 포스팅이 '학부에서' 힘든 점을 다루고 있는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 bound가 있다. 우선 대학원에서 수학을 공부할 때 힘든 점을 내가 다루는 건 불가능하다. -_-; 그래서 이 부분이 상계(upper bound)다. 반면 고등학생때까지 나는 평범한 자연계 일반고생이었고 수학의 '어려운' 부분에 딱히 접하거나 해 본 적은 없다. 내가 수학에서 크게 어려움을 느낀 부분은 거의 대학교에 들어와서부터였고, 여기에 내가 서술할 내용의 하계(lower bound)가 놓인다. 또 내 성장배경과 비슷한(평범하게 고등학교 생활을 하다가 대학에 와서 '수학'을 공부/전공하게 된) 사람 이외에는 딱히 조언이 될 만한 내용인지 모르겠다.
어떤 학문을 공부하는게 힘들다면 그 이유는 그 학문이 지니는 특징 때문일 것이다. 그 학문이 목적으로 하는 대상을 알기 위해서, 더욱 잘 알기 위해서, 학문은 배우는 사람에게 어떤 특정한 자세를 지닐 것을 요구한다. 태권도를 배울 때 서 있는 자세 하나도 새로 배워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하는 사고 방식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경제학을 배울 때는 '합리적'으로 사고하기를 요구받고, 법(중에서 민법)을 공부할 때는 '계약'이라는 개념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내가 느낀 바에 의하면 수학의 그러한 특징은, '당연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당연하다는 것은 인간적 사고이다. 수학의 맨 위, 그러니까 사람들이 쓸 수 있는 탁월한 결과에 가까워질수록 그런 당연함은 용납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용납해야 하는 당연함이 있다면 그것은 제일 기초에 있는 정의 밑바닥의 무정의 용어2 수준에서 존재한다. 공리라는 단어를 이용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수학에서 '당연함'을 이용해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철저하게 수학의 규칙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점, 여기에 수학의 어려움이 놓인다고 생각한다. 한편 논리 구축 과정에서 자명한 것도 있다. 이 경우 우리는 그것을 또 다른 정의로 쓰거나(...) 한다.3
나는 수학을 처음 배울 당시, 그리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이 당연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철저한 수학적 사고는(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내게는 머나먼 일이다. 아직까지도 나는 겨우겨우 예제 등을 통해 정의된 것들을 이해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일종의 확증편향이다. 이것도 엄밀하게 어떤 현상인지 정의하기 힘들기 때문에 예제를 몇 개 들자.
행렬이 나오기 전에는 곱셈에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sinc), (유리수 특성함수) 등을 처음 만날때마다 ‘헐… 이런 것도 있어?’라고 생각한다.
확률변수 이 있으면 왠지 모두 i.i.d일 것 같다.(?)
실수상에서 정의된 함수를 하나 생각해보라고 하면 거의 예외없이 해석적이며 무한번 미분 가능한 함수를 고른다!
수학에서 정의를 따라서 ‘순진하게’(수학적으로) 무언가를 만들다 보면, 많은 경우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평범한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수준이 되는 게 있다.4 수학을 배우는 입장인, 그러니까 아직 평범한 사람 수준으로 사고하는 사람의 머리속에는 그 정의의 매우 특수하고, 사실은 매우 좋은(Nice한) 경우만 사고한다. 이 상황에서 일반적인 정의에 적용되는 증명 같은 걸 배워도, 그 특수한 경우에만 적용해보게 되고, ‘당연한 것 같은데’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시험을 망치게 된다.
이걸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많은 예제를 습득하는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자면, 미적분학을 갓 배우며 미분가능하고 연속한 함수를 배우는 친구들에게 에서
로 가는 함수인데, 무리수일때 0을 돌려주고 유리수일때는 identity인 함수5를 알려주는 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다. 이 친구들이 아는 함수라고는 다항/지수/로그/삼각함수밖에는 없으니까... 사놓고 제대로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Counterexamples in Analysis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까지는 대충 작년 10월에 써놓은 내용이고, 이 글을 쓰는 시점인 2011년 12월 14일에는 조금 생각이 더 추가되었다. 많은 예제를 아는 것은 일단 언제나 중요하다. 수학과를 학부까지만 하고 다른 일을 할 거라면, 충분히 많은 예제를 습득하는 것 만으로도 만족스럽게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만약 대학원에 진학한다면, 혹은 그럴 생각이 있다면 예제를 아는 것은 물론이고, 저런 수많은 예제와 수많은 지름길을 돌파할 수 있는- 어찌 말하자면 '저런 예제를 Generate할 수 있는'- 일종의 재능이 필요하다. 재능이라고 해도 선천적이라기 보다는 훈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훈련은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일반적 교육과정을 거치며 수능을 위해 수학을 공부하는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막연히 그 훈련 과정의 일부가 소위 올림피아드 공부로 불리는 부분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리고 나는 저 재능을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다. 내가 올림피아드 출신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올림피아드를 안 하고 온 사람은 수학에서 정말 도태될 거라고 생각하는건가? 그건 아니다. 지금 나는 내 사정때문에 하지는 못하지만, 해결책은 있다고 생각한다. 올림피아드 공부 하면 된다... -_-; 늦더라도 상관 없으니. 만약 학부생이라면 대학생 수학 경시대회를 준비해볼 만 하다. 내가 이 사실을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학과 차원의 문제풀이 경진도 더 많이 참여했을 것이다. 나는 확실히 경시출신이 아닌 사람은 경시출신에 대해 불리하다고 생각하다. 그렇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지금 이 시점에 다시 출발선을 긋고 자기가 모자란 부분을 받아들여 채우기 위해 달려나가는게 최선의 해법 아닐까.
...넋두리가 되어버렸다.
- 지난 포스팅에서 여기까지 쓰고 글이 크게 탈선했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다시 쓴다. [↩]
- 원소라던가, 초등 기하학에서 점-선-면 같은 것들... [↩]
- 다른 학문도 결국 비슷하지 않느냐? 라고 물어본다면 적당히 긍정할 수밖에 없다. 난 다른 학문을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나 학문에 따라서 '철저히 학문의 규칙에 따라 사고하는 것'의 어려움의 양상이나 세기가 다를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
- 수학자와 물리학자의 12차원에 대한 이해에 대한 유머가 관련 있을지도 모르겠다. [↩]
- 잘 알다시피 이 함수는 0에서만 연속이다 [↩]
BL에 대해 생각하다
요즘 즐겨 보는 애니메이션 중에 TIGER & BUNNY라는 녀석이 있다. USTREAM이라는 서비스를 통해 생방송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1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챙겨볼 수 있으면 챙겨본다. 내가 설마 본방사수에 목숨을 걸게 될 줄이야... 어쨌든,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한번 또 횡설수설해볼까 한다.
이 애니메이션은 NEXT라는 이름의 초능력자들과 평범한 인류가 공존하는 세계의 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 히어로물로, 베테랑이지만 정의감에 휩쓸려 많은 사고를 저지르는 히어로 '와일드 타이거'와, 이지적인 외모에 냉철하고 범죄자에게 부모를 잃었다는 슬픈 배경을 지닌 신참 히어로 '바나비 브룩스 주니어' 두 사람이 콤비를 이루어 여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다. 어떻게 말하자면 히어로들의 일상을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요즘 꽤나 인기가 많은데, 그 인기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BL코드이다. 한때 야오이라 불렸고, 이젠 '여성이 지닌 남성과 남성 사이의 연애에 대한 판타지'라고 이해할 수 있는 BL은 일본발 서브컬쳐의 단단한 한 장르로 자리잡았...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주요 캐릭터의 남성비중이 높은 편이고 주역 또한 남성과 남성의 콤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BL 코드를 통해 해석될 여지가 높다.
게다가 가끔 제작진들이 '노린 듯한' 연출을 사용해, 다시 말하자면 '기존에 BL 문화에서 사용되던(내지 BL적으로 여겨지는)' 연출을 차용해 BL적으로 이 작품을 즐기던 사람들은 더욱 즐겁게 작품을 향유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나는 이 애니메이션이 꽤나 마음에 들었고, 특히 나는 2차창작을 정말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의 2차창작 중 가볍게 볼 수 있는 만화 종류를 자주 보는 편이다. 그렇다고 하나하나 다 찾아보는 건 아니고, 아티스트를 위한 온라인 커뮤니티 Pixiv에서 검색어를 통해 조금씩 보는 편이다. 이게 꽤 재미있다.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중이라, 새롭게 추가된 정보에 대해 반응해 새로운 만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그 만화를 보고, 태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하는 일련의 과정이 재미있다.
문제는 이 만화중에 많은 수가 BL 코드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어느 쪽이냐 하냐면, BL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일단 내가 남자기도 하거니와, 남성과 남성의 연애나 성행위에 대한 묘사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2 나는 BL 코드가 들어간 만화는 보지 않는다. 다행히 제목과 태그 때문에 내용을 끝까지 다 보고나서 '아... 이거 BL이었구나.' 하고 후회하는 일은 없다.
이쯤 되니 나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나는 BL은 즐기지 않는다. 한편, TIGER & BUNNY는 꽤나 BL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재미있게 보고 있다. 일종의 모순이 생긴 셈이다. 어디서 이 균열이 생겼을까를 생각하다 보니, 실타래는 자연스럽게 풀렸다. 일단 내가 TIGER & BUNNY에서 BL스럽다고 생각한 건, 당연히 두 주인공 '와일드 타이거'와 '바나비 브룩스 주니어'의 관계에서였고, 나머지 캐릭터들 사이에서는 딱히 그런 코드를 느끼지 못했다.
반면 (2차창작) BL의 세계에서는 이른바 '커플링'이 그 둘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작품 안의 많은 캐릭터들 사이로 퍼진다. 예를 들자면 '와일드 타이거'에게는 학창시절부터 친구였던 동료 히어로 '록 바이슨'이 있는데, 커뮤니티에서는 가끔 이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 얽혀 있는 그림들이 올라온다. 내 반응은 이렇다. "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되는데?!"
착각하기 쉬운 부분이지만, 부디 그러지 않아줬으면 하는 부분은, 그렇다고 내가 두 주인공의 커플링을 지지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두 주인공 캐릭터들 사이에는, 한없이 연애감정에 가깝다고 (특정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호감의 표시라고 여겨질 수 있는 묘사나, 러브코미디에 가까운 시츄에이션이 존재했다. 따라서 그 둘의 관계에 있어서는 연애감정에 관련된 아슬아슬한 묘사까지는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관계에서는, 연애감정에 대한 묘사를 못 느꼈고,3 따라서 다른 캐릭터들이 지니는 연애감정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단순히 말해 나는 (2차창작) BL에서 이야기가 '비약'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원작에서의 캐릭터들(과 이야기)과, BL에서의 캐릭터들(과 이야기) 사이에 비약을 느낀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BL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공 캐릭터 상징 글자)(수 캐릭터 상징 글자)라는 두 글자만 주어지면, 그 비약을 메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BL이라는 단어는, (또 어떤) BL이라는 단어와는 가리키는 것이 달랐던 것이다.
물론, 내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비약'은 BL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내가 BL을 봤을 때 느끼는 감정은, 오리지널 설정을 무리하게 갖다붙여서 전혀 공감할 수 없는 (BL이 아닌) 만화를 봤을 때 느끼는 감정과 유사한 것 같다. 단순히 말하자면 나는 BL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 이전에, 내게는 BL이 재미가 없는 것이다. 나라는 개인과, 광범위한 BL 팬층과, (그보다 더 많은) BL을 모르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그 어느쪽이 부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건 현명하지 않은 것 같다. 애초에 그리 말할 생각도 없었지만.
웬만한 상업 애니메이션, 혹은 서브컬쳐 작품에 인간관계를 그리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과, 그 주인공과 가장 많은 상호작용을 하는 캐릭터가 누구냐에 따라 이야기가 결정된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인공 소년과 히로인 소녀를 다루는 이야기로는, 라이트 노블이란 장르가 하나의 극한을 달리고 있지 않나 싶다.
TIGER & BUNNY의 경우에는 이 두 캐릭터가 모두 남성이었을 뿐인 거다. 이 작품이 둘의 관계를 다루면 다룰수록,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폭은 제약되면서도 또한 넓어지기도 한다. 내가 이 작품에서 느끼는 재미란 BL과는 상관없이 이런 부분에 있었던게 아닐까 싶기도.
그렇다면, BL이 재미없는 사람으로서는 '대체 왜 (어떤) 사람들은 BL을 즐길 수 있을까'하는 호기심이 생기게 된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그럴듯한 분석을 해 놓았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의 접근을 하자면,
......뭔가 여성이 청소년기에 얻게 되는, 남성이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민감한 인간관계 파악 능력에 대해 썰을 풀어놓을려고 하다 보니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것 같아 그냥 쓰지 않기로 한다.
따라서 여기까지 와서 결론이 빈궁한데, 대충 마무리하자면 서브컬쳐 향유 커뮤니티에서 주된 소비자는 아동이나 아동하고 별 차이 없는(-_-) 남성들이었는데, 그런 작품들이라고 해도 캐릭터나 스토리는 어떤 여성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애나 성에 관한 묘사에 있어서는 철저히 남성중심의 마초이즘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서브컬쳐 판이었는데, (어떤 계기로 발견된) BL, 그 이전의 야오이는 여성의 연애에 관한 인식에 부합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BL은 서브컬쳐에 있어서의 여성의 욕구와 갈망을 인지하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시도로, 서브컬쳐에 있어서의 페미니즘 선언인 것이다!
반값등록금을 생각한다
요즘 반값등록금이 뜨겁다. 내 생각은 이렇다. 반값등록금은 구호이고, 결코 반값등록금이 목표여서는 안 된다.
등록금이 반액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반액등록금이라는 결과 자체가 긍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장 원리에 의해 등록금이 반값이 된다면, 그것은 교육의 종합적 질이 (이론적으로) 절반이 된다는 의미이고, 증세를 통해 이뤄진 반값 등록금은 그냥 돈 나가는 구멍이 조금 달라지는 것 뿐이다. 난데없이 뿅 하고 등록금이 절반이 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반값등록금 소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 그것은 아니다. 반값등록금은, 결국 지금 젊은 세대가 받고 있는 각종 불합리할 정도의 착취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어떠한 사회적 요구에 의해 대학에 진학할 것을 강요받고 있는데, 그 대학들은 요즘 높은 등록금과 생활비(기숙사비 등)를 통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이 자력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결국 부모의 손을 빌리거나 직접 노동을 하게 된다.
부모의 지원으로 학교를 다니는 경우는 일단 미뤄두고, 직접 노동을 하는 경우를 살펴보면, 여기에도 사회문제가 있다. 바로 노동 착취 문제이다. 딱히 젊은이들만의 문제는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생활 경험이 적은 젊은 층이 겪기 쉬운 문제다. 약 30만명이 임금체불 문제를 겪고 있고, 그 액수는 대략 1조 3천억원이다. 악의적이라고 볼 수 있는 임금체불 문제 말고도1 별 악의없이 뽑는 '무급인턴' 제도도 있다. 말 그대로 '너는 이 일을 통해서 경험을 얻으니 좋지 않냐. 그러니까 차익(노동으로 발생한 가치)은 우리가 전부다 가져가겠다. 그래도 너한테 남는 장사다.'라고 말하는 제도다.2
다시 말해 (고등학교)-대학교-취직으로 대표되는 일반적인 젊은 세대의 생활반경 동안, 우리 사회는 이들의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는 구조를 만들어놓았다. 돈을 벌어야 할 필요를 어쨌든 앞당겨 만들고, 돈을 벌려면 늙은이3들이 만들어놓은 판에서 또 돈을 쓰고 몸을 바쳐야 한다. 취직을 하기 위한 각종 스펙에는 한번 시험을 치는데 수십만원이 드는 영어 점수가 포함되고, 경험 내지 이력서 내의 한 줄을 위해 노동을 무상 내지 헐값으로 제공한다.
애초에 인턴이라는 제도가 강제도 아니니만큼, 이런 비판에 대해 기업의 옹호자들은 '싫으면 하지마' 식의 지극히 계약자유원칙 수준에서의 반론을 제시한다. 한편으로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으면 고용 사회에 끼워줄 수 없다고 협박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인턴제도에 실익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인턴으로 일하는 기회는 (고용측이 아예 작정하지 않는 한) 좋은 기회이며, 젊은이들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말할 근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실제로 젊은이들을 착취하는 이런 시스템들은 정말 교묘하고 복잡하게 설계되어있다. 시장의 강자가 (부당할 정도로) 많은 이익을 보는 구조면서도, 그 구조는 일견 정당한 것처럼 보여, 이런 시스템을 공격하기는 힘들다. 학자금대출도 마찬가지고, 이공계장학금4도 그런 시스템이다. 그러나 이 시스템 아래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반값등록금이라는 구호는, 그런 점에서 돌파구가 된다. 일단 많은 대학생들이 금전적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또 대학 등록금이 '대학생 평균이 무리없이 지불할 수 있는 금액'보다 큰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받고 있고, 그 원인은 이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나설 명분이 된다.5 정치적인 구호가 되어 사람을 모이게 할 수 있다. 그 정도의 힘은 있다.
문제는 다음이다. 대학 등록금이 절반이 되는 것, 그 자체가 잘 실현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통해 이 사회의 좀 더 뿌리깊은 문제에 접근할 수가 있다. 일단 적립금을 쌓아놓고 등록금을 무섭게 올리는, 이제와서는 기업과 별 차이를 못 느끼겠는 사학들을 수술할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국립대 법인화 문제에서도, 대학의 영리 추구 기업화를 견제할 수 있다. 비정상적으로 높은 대학진학률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도 있겠다. 위에 쓴 것처럼, 젊은 층의 착취 문제로도 연결시킬 수 있다. 더 나아가면,6 일반적인 경제적 착취 문제로도 연결되는 도화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 중점을 둔다면 좀 더 의미있고 사회를 좀 더 (두루뭉술하게) 좋은 곳으로 만들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한대련은 반값등록금의 구호에 주한미군 철수를 슬쩍 얹었다. 에라이.
- 뭐 악의적이 아닌 임금체불도 있겠지만... 그냥 '이런 악의적인 노동 착취 이외에도'라고 쓰고 싶은데 왜 그러질 못할까. [↩]
- 아마도 '고등학교때 봉사활동 하던 감각으로 일좀 해봐라' 같기도 한데... [↩]
- 노인이나, 어르신이 아니고, 늙은이다. 이 글에서의 늙은이는 먼저 태어나서 젊은이들보다 일할 시간이 몇십년은 더 있었고, 그 시간을 통해 부와 권력을 쌓고, 젊은이들이 이것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
- 이공계장학금은, 약간 주제와 빗나가지만, 수혜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시스템이다. '비이공계 진출시 이공계장학금 환수'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
- 물론 경찰한테는 그런 것 없다. 아마 이들의 머리 속에는 집회시위의 자유가 없는데, 법이 그걸 인정하니까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별 꼼수를 다 쓰는 것 같다. [↩]
- 사실 위에 쓴 '젊은 층 착취'는 사실 연령과 세대의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한다. 기득권과 기득권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로 넣어도 딱 맞고, 오히려 그게 더 적합하다 볼 수도 있다. 따라서... [↩]
셧다운제는 아이들을 확실하게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게임, 어쩌다 이지경까지…라는 기사의 서두에 "셧다운제는 아이들을 죽음에서 구하자는 얘기다."라는 김민선 아이건강국민연대 사무국장의 발언이 소개되어 있어 긴 침묵(사실 끄적대던 글이 있기는 한데 아직 다 쓰지 못함)을 깨고 포스팅을 올린다.
게임 셧다운제야말로 아이들을 확실하게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말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아이들정도는 죽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는 이미 많이들 죽어 나가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세대가 거듭될수록, 이 정책으로 인해 죽어가는 우리의 아이들은 늘어갈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게임 셧다운제를 반대해야 하는 이유이다.
1. 게임 셧다운제가 아이들을 죽이는 확실한 방법은, 바로 학부모 스스로가 자기 아이의 목을 죄게 만드는 것이다. 애초에 아이들이 왜 게임에, 그리고 인터넷에 중독이 되는가를 이해하고는 있는가? 학부모들이 자기 아이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는가? 애초에 자기 아이들이 뭘 하고 놀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가?
진정한 문제는 바로 게임이 아니라 바로 가정에 있다. 그것도 '몇몇' 가정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가정에 문제가 있다.1 수많은 가정에서 학부모들은 게임에 대해 무지하다. 중학생인 아들이 하는 게임이, 사실은 18세 미만 이용불가 게임이며, 그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어머니가 얼마나 될까?
당연한 것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가정에서의 관심과 보살핌, 특히 부모의 훈육이 필요하다. TV를 볼 때나 책을 볼 때 당연히 그러듯이, 아이들이 플레이할 게임도 당연히 부모들이 한 번 필터링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 과정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물론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 부모님 세대는 게임을 모르고 자랐고, 아이들이 엄청난 속도로 게임을 이해하는 것에 비해 부모 세대가 게임에 대해서 잘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 격차는, 게임과 함께 성장한 게이머 세대들이 부모가 되어가면서 좁아질 것이고, 어떻게 보자면 '일시적인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셧다운제와 같은 제도는 이러한 부모의 게임에 대한 무지를 고착화시킨다는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유해 요소는 정부에서 알아서 차단해 주니까, 부모님 여러분께서는 아이들을 학원 버스에 무사히 태우는 것만 신경써 주세요."와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어떻게 보자면 각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할 교육을 정부에서 가져간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인 무언가(어떤 소설이 있었던 것 같은데)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가정이 맡아야 할 부분을 제거함으로서 가정을, 부모를 더욱 '멍청하게'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점이 더욱 문제다.
물론 많은 사람들(학부모들)이 셧다운제를 찬성하는 입장이다. 자기 아이들이 새벽에 게임하는거 제대로 막지도 못 하고 있는 와중에 법으로 막아주겠다니 당연히 찬성할 만 하다. 그러나 당장 얻을 지지와, 향후의 파급 효과를 생각해보면, 이것만한 포퓰리즘이 어디 있는가?
셧다운제는 이런 식으로 진정한 문제에 대한 접근을 막고, 단지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를 덮는다는 점에서, 아무런 효과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문제 해결을 방해하는 접근 방식이다. 암 환자에게 진통제만 투여하는 꼴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기사에서
“요즘 고등학생들이 부모 말을 듣나요? 밤 12시 이후에 게임하는 고등학생 자녀들을 부모가 통제할 수 없어요. 그러니 19세 미만으로 해야 합니다.”
와 같은 발언이 나오는데, 조금만 고민해보면 "요즘 고등학생들이 부모 말을 듣나요?" 가 진정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는가? 이 말이 맞다고 하면, 이미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가정에서, "미성년자이고, 아직 부모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고 여겨지는 고등학생들이 부모의 통제를 벗어난 상황"이 왔다는 것이다. 이게 게임의 문제인가? 여기에 대고 게임을 막는다는 것이, 그저 조금 부모를 안심시키는 것 이외의 무엇을 해 줄 수 있다는 것인가?
차라리 학부모 단체에서 이러한 제도를 요구했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다. 설령 그 방향이 옳지 않다고 하더라도, 부모들이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이야 거짓이겠는가. 그러나 행정 단체에서 이러한 제도를 밀어붙이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자식 사랑에 자식을 망칠 수 있는 분들이 바로 부모들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부모들의 이런 행동을 욕할 수야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행정 단체가 이 수준까지 내려와서 뭘 하겠다는 건가? 인기에만 영합하는 정책일 뿐이다. 정부가 가족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면, 부모가 아무 제약 없이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부모를 똑똑하게 만들어야 한다. 흔히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들 하지만, 부모는 몰라서는 안 된다. 그게 개인의 문제라면 또 모를까. 국가적으로 부모의 무지를 조장하는 것은, 부모가 아이를 목 조르게 만드는 일이다.
2. 게임 셧다운제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의 청소년의 지위가 어떤지를 암시한다. 물론 게임 셧다운제는 (MBC의 게임 폭력성 실험 등과 같이) 대한민국에서의 게임, 게임 산업, 게이머, 게임 산업 종사자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이 부분은 일단 미뤄두자.
애초에 청소년들이 왜 자정 넘어서까지 게임을 하는가? 수면 장애가 있는거라도 아니면, 청소년들도 밤에는 잠이 오고, 자고 싶을 것이다. 왜 자정 넘어서까지 게임을 할까? 정말로 슬픈 것은, 우리가 이 문제의 답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면 낮에는 학원 가니까. 학원을 안 가더라도, 어쨌든 학생은 공부해야 하니까.
이게 정말 빌어먹을 일이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얼마나 닭장같은 상황에서 자라는지는 다들 알고 있는데, 다들 거기에 대해서 함구한다. 문제인 걸 알아도 뭐 어쩔 수 있냐는 거다. 위에 언급한 기사에 보면
김 국장은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수면시간이 짧은데, 그 이유는 과도한 학습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밤새우며 게임을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관련 분석 보기)
이 게임 셧다운제가 시행되어 이루어질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이 나라에서 청소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거의 대놓고" 알 수 있다. (수면 시간을) 넉넉잡아서 7시에 일어나고, 8시부터 자습, 9시부터 수업을 들어서 3시에 수업 끝나면 학원, 학원에서 10시까지(넉넉하게 잡은거다! 내 경우에는 새벽 1시까지 공부했다) 공부하다가 집에 들어오면 11시. 일어나서 먹는거 이동하는거 빼고는 공부밖에 안 했는데, 남는 시간이 8시간밖에 없다. 수면시간 8시간이면 너무 많이 잡은건가?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적당히 빈틈 봐서 학생들 놀건 다 챙겨서 논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노는 걸로 인정할거면 학원 선생들이 학생들 도망쳤다고 패지는 말아야지. 피시방 갔다고 쪼지는 말아야지. 이 사회에 너무나 많은 것이 비행이다. 이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모르는 사회 구조는 청소년이 해야 할 행동이 화이트 리스트로 이루어져 있다. 리스트에 적힌 거 빼고는 다 비행.
잡기 쉬운 두더지부터 잡는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그 두더쥐를 잡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3. 게임 셧다운제는 우리 아이들의 놀 문화를 파괴한다. 물론 지금 게임이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좋은 놀이 문화인가를 묻는다면 아니라고 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다음 세대, 다다음 세대는 다르다.
새로운 매체에 대한 불신과 저주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날 지위를 확립한 시, 소설은 역사에서 확연히 홀대받았던 기간을 확인할 수 있고, 영화는 차라리 빠르게 자리를 잡고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이 다를 것이 있겠는가? 게임은 직접적 상호작용이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지니는 예술의 분야이다. 딱히 이렇게까지 치켜세우지 않아도, 지금 이 글을 쓰는 사람을 포함해 게임에 옹호적인 세대가 이 사회의 가장 늙은 사람이 되어 있을 쯤에는, 게임은 그 자리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게임 셧다운제가 대한민국의 게임 '산업'에 악영향을 주리라는 것은, 이 글의 어떤 예측보다도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게임 산업이 없다면, 한국을 표현할 만한 예술로서의 게임도 세계적으로 그 자리를 잃는 것은 당연하다. 딱히 한국이 세계에서 게임으로 1등을 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다. 문제는, 결국 한국 사람들도 게임을 하게 될텐데, 그 때 우리가 플레이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외국산 게임일 것이다. 한국인이 만들고, 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하고, 한국이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게임 같은 것은 없거나, 모두 고사 직전이 될 것이다. 청소년보호법이 만화에 끼친 영향만 봐도 자명한 일이다.
사실 이러한 문화적 종속은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뽀로로를 졸업한 아이들이 다음으로 보게 되는 TV 애니메이션의 얼마나 많은 수가 일본산인가. 일본인의 정서를 담은 작품을 본 아이들이, 한국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인에 가깝게 자라게 된다고 하면 그것을 지켜볼 일인가? (물론 학교-학원-잠과 같은 반복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유년기를 살지 않는 이상, 한국인과 정서를 소통할 기회는 많을 것이고, 이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체 왜 한국에서 문화를 지우려고 하는가? 혹시 한국적인 것과 '(한국의) 전통적인 것'을 헷갈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사실 한국인이라면 한국인처럼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인의 정서를 담고 있는 작품, 혹은 한국적인 작품을 시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2 영화는 다행히 어느정도 되고 있는 것 같다. 만화도 고꾸라지다가 웹툰이라는 활로를 찾고 나아가고 있다. 이제 게임에 시련이 닥칠 차례가 온 것 같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정부의 수준이 치맛바람 수준을 넘지 못한다면, 게임은 국가 단위로 망할 것이고,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향유할 문화는 또 하나 줄어들게 될 것이다. 국가 단위의 자폐증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아마 게임 다음의 새로운 매체와 놀이도 비슷한 시련을 겪지 않을까 한다.3
아, 혹시 아이들은 놀지 말고 공부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딱히 없다. 그 사람의 아이들에게 자폐증이 생기지 않도록 인도적 차원에서 기도해 주는 것 정도?
맺으며
셧다운제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찬성하는 사람도 있다. 대개 반대하는 사람들은 게임 산업의 논리를 들고, 찬성하는 사람들은 청소년을 보호하겠다는 논리를 든다. 내가 보기엔 이건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사실, 우리가 어찌 팔불출 부모의 자식사랑을 뭐라고 할 수 있겠나. 단지 정부가 그 수준에 영합해 진정 가족에게 필요한게 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는것을 지적하고 싶다.
게임 셧다운제도가 정말 청소년을 구원할 것인가? 나는 일단 이걸 먼저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Five Intersecting Tetrahedra (다섯개의 교차하는 정사면체)
인터넷을 돌다가 이런 곳을 발견하고 맨 위 사진을 보며 헉헉대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만들었습니다. 설계도는 여기를 참고하였습니다.

일단 밑준비이자 제일 힘든 부분. FIT(다섯개의 교차하는 정사면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정사면체를 다섯개 만들어야 하는데, 이 정사면체는 변(1-cell?)을 기준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한 정사면체당 여섯 개의 유닛이 필요합니다. 참고로 사용되는 유닛은 Francis Ow의 '60도 유닛'. 제가 정말 좋아하는 유닛이죠. 즉 유닛이 삼십 개 필요한데, 종이를 길게 삼등분해 사용하기 때문에 열 장을 준비해야 합니다. 삼등분 접기선을 넣는거랑, 그 선대로 자르는 거 둘 다 매우 힘들었습니다.

유닛 삼십 개를 접는 것은 무척 쉬웠습니다. 제반니가 하루만에 해주었습니다.

첫 번째 정사면체를 조립했습니다. 매우 쉬움...

두 번째 정사면체까지 조립했습니다. 매우 간단하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두 정사면체가 대칭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부분이 재미있는데, 이 성질은 처음에 연결하는 두 개 뿐만 아니라 다섯개 정사면체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즉 10개 조합(개)에 대해 이 성질이 만족된다는 거죠. 어떻게 보자면 당연한 거고, 어떻게 보자면 매우 흥미롭죠. 설계도에서도 말했지만, 이 성질이 조립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줍니다.

세 번째 정사면체입니다. 살짝 헤멨습니다. -_-; 슬슬 복잡해집니다.

네 번째 정사면체는 설계도를 봐도 아리송합니다. 이걸 조립하기 위해 세 번째 정사면체를 한번 뜯었습니다. 여기까지 완성하고 나니, 다섯 번째 정사면체 유닛은 어디를 지나가야 할지 그냥 보이더군요.

완성입니다.

위에서 본 모습입니다. 각 색깔별로 하나씩 뿔을 모으면 작은 별모양이 나오죠? 그 뿔들을 이으면 정십이면체의 오각형이 됩니다.
접다보면 약간씩 접히는 부분이 생기는데, 이게 제가 잘 못 접어서 그런지 아니면 1/3이라는 베이스 설계가 자의적인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글 레이아웃이 약간 거슬리는데 이것도 어떻게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와 인형: 인형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기대
COEX에서 열리는 2010 서울인형전시회에 갔다왔다. 작년 행사와 마찬가지로 동아리 후배 한명과 동행했고, 작년과 마찬가지로 유의미한 경험이었다. 인형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해 정리할 수 있는 기회 또한 되었고.
내가 처음 인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게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중학교때 이후로는 속해있는 문화권 덕분에 각종 인형(특히 '구관'이라 불리는 것들 - 구체 관절 인형)을 다루는 문화에 상대적으로 익숙하기는 했다. 그렇다고 내가 인형을 다룰 만한 위인은 못 되었다. 지배적인 이유는 귀찮아서1일 것이다. 그러다 서점을 뒤지는 도중 이제이북스의 '살아 있는 인형'이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고, 인형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미래의 이브'라는 소설이 언급되는데, 그때 마침 나는 ALI PROJECT에 심취해 있을 때였고, 이 그룹의 (동명의) 곡 '未來のイヴ'이 이 소설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을 눈치채게 되어 이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래의 이브'는 프랑스의 소설가 빌리에 드 릴라당이 1886년 발표한 소설로, 한국에는 아직 번역출판되지 않은 것을 미리 밝혀둬야겠다.2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실존인물인 에디슨에 대해 다룬다. 에디슨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위인전에서 자주 나온 알품기라던가, 1%의 영감과 뭐시기라던가, 전구 발명이라던가, 그리고 좀 더 관심있는 사람은 GE라던가 테슬라라던가 하는 조금 안타까운 이야기도 안다. 그러나, 한편, 에디슨은 인형사(만약 그런게 존재한다면)에도 족적을 남겼다. 축음기를 발명한 그는 이것을 '목소리를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로 판매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말하는 인형이었다. 상업적 성패는 차치하더라도 이건 여러모로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신시대의 꿈과 희망을 선사했으리라 생각한다.3 '미래의 이브'는 그 한 가닥으로, 천재 발명가 에디슨이 사랑에 낙담한 청년 에왈드 경에게 이상적인 여성을 '창조'해 준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사람들이 새로운 발명이 가져다줄 미래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음미하며 읽어보기를 추천한다.4
이야기가 좀 돌아갔는데 이런 일련의 인형 관련 서적과 각종 오타쿠 컨텐츠5를 독파한 결과, 나는 꽤 인형이라는 문화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관련된 책을 더 읽을 수는 없었는데, 아마 서점에서 책을 찾는 능력이 아직 부족한 것 같다.6 관련 서적이 부족한 상태, 그러니까 흥미는 있어도 자극을 받을 수는 없는 상태에서 내가 찾을 수 있던 기회가 바로 이 서울인형전시회였다. 여기에 두 번 참석하면서, 내 나름대로 내가 인형에 흥미를 가지는 이유를 발견했다.
서울인형전시회에 가면 정말 다양한 종류의 인형을 만나볼 수 있다. 인간형 인형(같은 말을 동어반복하는 것 같지만)은 물론이고, 테디베어, 아이들을 위한 안전 동물 장난감(...) 등도 다루고 있다. 학교나 학원에서도 부스를 차렸다. 개중 가장 다양한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건 단연 인간형 인형이다. 소재는 구체관절(음... 점토를 구우니까... '자기'가 되나?), 클레이, 헝겊, 닥종이 등으로 다양하다. 인형의 주안점도 조금씩 다르다. 상업적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인형들(흔히 말하는 바비인형같은 것들)에서부터 인형공방에서 수제 비슷하게 만들어지는 인형들, 또 인형옷들, 인형을 포함한 디오라마, 예술적 표현을 시도한 듯한 인형들, 또 인형이 생활하는 집에 이르기까지.
2009년과 2010년 사이의 겨울에 그런 버라이어티를 구경하던 도중, 어떤 인형을 발견하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2009년에 동아리 후배들이 만든 어떤 게임에 등장하는 몬스터와 흡사했던 것이다. 그 몬스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는 그렇지만, 한 명의 천재 예술가 지망생이 빚어내고, 보는 사람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던 디자인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 인형을 목도한 이후, 이곳에는 컴퓨터 게임에 바로 들어가도 상관없을 정도7의 크리쳐 디자인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10년과 2011년 사이의 겨울에 와서 그 느낌은 확고해졌다. 이 사이에 나는 게임을 만들지 않게 되는 것이 거의 확정되어서 더 써먹을 곳은 없지만, 좀 더 근본적인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나는 인형에 흥미가 있지만, 그 흥미 분야가 꽤 좁다는 것이다. 실존 인물을 비슷하게 모사하고, 옷의 디테일을 얼마나 살리는가 하는 것은 분명히 인형의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 부분에 흥미가 별로 없다. 나는 인형을 만드는 사람들이 어떻게 인체에 대해 접근하고 그것을 왜곡하여 새로운 표현을 만드는지에 관심이 있다.
나는 인형을 '인체에 대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수식어는 오랫동안 무용이 차지해 왔지만, 아마 내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혼동의 여지는 적다고 생각한다. 인형을 조소의 부분집합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인체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소와는 다르고 또 깊은 발전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알다시피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사람이 아닌 것에서 사람을 발견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사람의 형태를 지닌 것에 대한 사람의 감정 이입에 대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인형(허수아비, 토우 등)과 관련된 풍습만 살펴봐도 관련 결과가 수두룩하다. 인체에 관한 탐구는 예술가들의 관심을 오랫동안 받아왔지만, 몇몇 전위예술가들이 내세운 신체의 훼손이라는 모티브는 인형으로 오면 더이상 (상대적으로) 금기가 아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예술이 인형에서는 가능하다. 물론 우리가 인형 예술이라고 보는 것들 중 많은 것은 부자연스럽거나, 기괴하거나, 섬뜩하다. 그러나 어릴 적에 레고를 가지고 놀면서 사람 몸을 이리저리 해체하거나 창조적으로 '조립'하는 것을 머리에 떠올리면, 이것이 그렇게 근본적으로 역겨운 일은 아니라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인간은 어쨌든 인형에서 인간을 발견하기 때문에 인형을 이상하게 다루는 것을 보면 인간을 이상하게 다루는 것처럼 근본적인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 인형의 묘미가 놓이는 것 아니겠는가.
특히 구체관절인형은 '부품화된 신체'8라는 특성을 갖는데, 이것은 일종의 형식화된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을 이용한 결손의 표현은 이제는 진부할 정도이다. 신체부품의 대량생산과 교체에 대한 모티브까지도 연결되는 이 특징은, 비인간적 부품과의 교체와 같은 방식을 통해 내게 새로운 감각을 가져다 주었다.
내가 인형에 대해 앞으로 기대할 일이 있다면, 뭐 당연하게도 인형이 내게 계속 자극제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사실적인 인형을 만드는 일이나 인형의 주변세계를 인간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도 물론 인형의 발전에 중요한 일이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인형으로 더 과감한 표현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인형을 통해 인간을 관찰할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9
그리고 혹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 부탁이 있다면, 지금 날려쓴 글은 제가 배운 것 없이 느낀 것만으로 쓴 글이기 때문에 인형 관련해서 좋은 가르침을 얻을만한 서적 따위를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리고 마무리로 이것. 유쾌하긴 한데...
- 어떠한 취미를 '귀찮아서' 하지 않는다는 말은, 단순히 하기 싫다는 말이 아니라, 발화자가 당시 가지고 있는 시간적, 금전적, 정신적 여유를 복잡적으로 고려해 봤을 때 취미로 시작하지 않는게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유익하다. [↩]
- 그러나 이 글을 쓰며 찾은 희소식에 의하면 올해 상반기 안에 출판될 것이라 한다!! [↩]
- '살아 있는 인형'에 의하면. [↩]
- 참고로 나는 번역본이 없는 이 책을 일본어판으로 읽었지만, 번역이 1977년에 되고 수정되지 않은 책이라(!!) 읽는데 살짝 고생했다. 그대로 공의 경계 일본어판보다는 나았다. [↩]
- 대표적으로 꼭두각시 서커스, 로젠 메이든, 영웅전설 5 바다의 함가 정도를 들 수 있겠다 [↩]
- 인형 제작에 관한 책은 읽어봤지만. [↩]
- 물론 내 커트라인이 낮은 탓도 있다 [↩]
- 인간의 관절과 거의 같은 동작을 하기 위해 주요한 관절이 구체로 처리되고 가동될 수 있기 때문에 구체 관절 인형이다. 따라서 구체관절인형의 큰 부위는 - 머리, 몸통, 손, 팔다리등은 - 기본적으로 분해되는 부품이다. [↩]
- 놀랍게도 이것은, 내가 게임에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
버스를 타고 가면서: 만약 대학에 훨씬 적은 수의 사람이 간다면
대학에 훨씬 적은 수의 사람이 간다면, 회사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을 채용해야 할 것이고, 대졸 임금보다 적은 부담이 될 것이고, 청년노동착취 문제가 어느정도 고쳐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윗 문단은 별 생각 없고 고려 없는 일직선 자유연상법에 의한 사고이기는 하지만, 대학진학률이 높은게 마냥 자랑은 아니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Trivial Proofs : 모든 유리수는 유한소수로 나타낼 수 있다
제목이 좀 낚시지만
Theorem. For every nonzero , there exist
such that
is represented finite in
-numeral system.
Proof : Let where
and
are relatively prime, then
is the base what we are looking for. If you are heavily bored, you can use any
such that
for some integer
.
써놓고도 쪽팔린다-_-;
수가타 미트라: 스스로를 교육하는 법에 대한 새로운 실험
번역 Jeong Jinmyeong
감수 Tae-hoon Chung
1. 내 경험이 얼마나 일반적일지는 모른다. 단지 내 어릴적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골목에서 운동장에서 뛰어 놀았다. 골대로 삼을만한 게 있기만 하면 축구를 했다. 여자애들은 고무줄 놀이를 했고, 땅따먹기1를 할 줄 알았다. 공기놀이는 남녀 가리지 않고 즐겼다. 요즘 아이들이 이런 놀이를 요즘도 하는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우리 세대는 골목의 정서가 성장과정에 박혀있다는 것이다.
2. 그러나 한편으로는, 절반 이상의 가정에 컴퓨터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 게임을 설치해서 노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PC방에 가는 것은 와리가리2와 마찬가지로 놀기 위한 방법의 하나의 선택지였다. 게임잡지는 공짜나 가까운 가격(그러나 여전히 초등학생에게는 부담스러운 가격)에 정품 게임을 뿌리고 있었고, 바람의 나라를 플레이하기 위해서 아이들은 쿠폰이 들어있는 공략집을 사고, 특정 브랜드 컴퓨터3를 가진 아이를 부러워하는 등 난리를 부렸다.
3. 그 때 우리들은, 아니 나는, 게임을 잘 했다. 몬스터를 잘 잡는다거나, 상대를 쉽게 이긴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건 (심각하게) 잘 못했다. 내가 게임을 어떻게 잘 했냐면, 언어의 장벽 나부랭이를 쉽게 돌파하고, 게임의 규칙 따위를 쉽게 이해했다는 것이다. 어릴때부터 컴퓨터와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은 이것과 비슷한 경험을 겪어봤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잘 한다는 건 지금 내가 가진 기준과도 살짝 다르다. 어릴 때에도 분명 진행이 틀어막혀서 같은 NPC에게 말을 수십번 걸기도 했지만, 별로 그걸 짜증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이런 일이 있으면 매우 짜증을 내지만. 그때 나는 어떤 상태에 있었다고 이름붙일 수 있을까?
4. 이런 경험을 염두에 두면, 수가타 미트라의 강연을 우리들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어린이는 매우 능동적으로 주변 환경을 흡수하는 능력을 지녔다. 이 능력을 이용해 어린이들은 일견 (어른의 입장에서) 불가능해보이는 행동을 할 수 있다. 어린이가 세상을 배우는 방법은 어른이 세상을 배우는 방법과 매우 다르다. 조금만 더 이 주장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자면, 어른이 어린이가 배우고 익힐 것을 통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조기교육에 목을 매는 우리네 부모님들이 결코 듣고 싶지 않은 주장일 것 같다. 이 능력은 컴퓨터, 즉 최초의 무인 범용 상호작용자와 결합해 수가타 미트라가 얻어낸 결과를 가능하게 했다.
5. 내가 게임을 예로 든 것은, 안타깝게도 이 강연을 통해 밝혀진 내용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기는 힘들 것 같다는 내 판단 때문이다. 만약 교육이 흥미에 의해서 생겨난다면, 모든 교육이 가장 흥미있는 곳에서만 일어나지 않을까?4 이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수도 있다. 문제는, 컴퓨터를 통한 흥미의 중력 우물에서 가장 낮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게임이라는 것이다. 게임은 어떻게 하면 사람의 감정을 조작해 사람들을 붙들어 놓을지를 수십년간 연구해온 무시무시한 분야이다. 자본주의의 규칙을 철저히 따른다면 그 어떤 상인도 SSM을 이길 수 없게 되듯, 재미가 모든 것을 결정하게 놔둔다면 게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떤 교육자료를 가져다줘도, in a long term, 어린이들의 흥미는 게임으로 가 버리지 않을까.
6. 수가타 미트라가 한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실험을 하지 않은 것은 꽤나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의 아이들은, 누구건, 어디에 있건 상관없이 '어린이의 능력'을 게임을 이해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어린이들이 이러는 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어른들은 자신이 앞으로 10년, 20년 후 살 사회에 새로 진입할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을 요구했는지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A. 이와는 별개로, KAIST 수리과학과의 모 교수님께서는 "수학은 말로 하는 학문이다"고 말씀하셨다. 최첨단을 가는 데 있어서는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서로 의논하며 생각을 교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수학에 대한 어려움은 공부를 의논할 친구가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